디자인에서 기획, 기획에서 개발, 나를 찾는 여정

Apr 10, 2025 · 23 min read

디자인, 기획, 개발
7년 동안 나는 3가지 분야를 거쳤다. 

어쩌다 보니 짧은 기간 동안 많은 분야를 경험했다. 지난 7년은 나를 찾기 위해 부단히 고민하고 부딪치면서 깨닫는 과정들이었다. 주변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굳이 그걸 경험해 봐야 아냐? 척 보면 맞는지 안 맞는지 알지 않나?”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직접 겪어보고 부딪쳐봐야만 아는 사람이어서 무식하게 직접 뛰어들고 깨져보면서 배웠다. 그리고 직접 해본 덕분에 알 수 있었던 것들도 많았다. 가령 스스로에 대한 이해가 그러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에 대한 이해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 과정은 마치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조각하는 과정과 같았다. 나와 맞지 않는 부분을 찾아내면 조금씩 깎고 다듬었고, 잘 맞는 부분을 붙였다. 그런 식으로 모호했던 나의 자아 그리고 개성과 특성을 구체화하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나라는 사람에 대해 7년 전보다는 훨씬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3가지 분야를 모두 거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사실들이다. 각 분야를 거치면서 받았던 각 분야에 대한 인상과 그리고 깨달은 점을 이번에 적어보려고 한다.


디자인: 나는 넓은 시야로 바라보는 사람이다.

고통스러운 수험생활의 유일한 안식처는 애니메이션이었다. 몰래 엄마 핸드폰을 가져와서 밤새도록 애니메이션을 보고 학교에서 친구들과 떠드는 것이 삶의 낙이었다.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림에 관심이 생겼고, 그림을 하나씩 따라 그리다 보니 잘 그린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그림 실력이 늘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시각디자인학과에 들어가게 되었다. 

대학에 다니면서 4년간 디자인을 배웠다. 짧은 기간이지만 이때 내가 느낀 디자인의 본질은 이미지를 날카롭게 사용하여 상대방에게 의도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이미지를 날카롭게 사용하려면 감각이 뛰어나야 한다고 느꼈다. 색감이라던가 간격, 디테일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해서 하나하나에 의도를 담아야 했고, 그렇게 집요하게 의도를 담은 디자인이 인정받았다. 디테일의 여부에 따라 완성도는 천차만별이었고. 여기에서 거장과 학생이 갈린다고도 느꼈다.

근데 나는 그렇게 디테일에 편집적으로 집착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그 색은 그 색이고, 그 간격이 그 간격이었다. 친구들은 색상 코드를 척척 맞추고, 1px 차이에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만들어냈는데,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내고 조정하는 건 나에게 고문 그 자체였다. 다른 친구들이 날카로운 칼을 갖고 작품을 척척 만들어 낼때, 나는 마치 날이 없는 케이크 칼을 들고 작품을 만드는 느낌이었다. 나는 매번 수업 시간 때 다른 친구들의 작품을 보면서 절망을 느꼈다.

생각하고 의도를 만들어내는 건 재밌었지만, 그걸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이 너무도 고통스러웠기에 결국 나는 디자이너의 길을 포기했다. 계속 포기하지 않고 디자인을 했더라면 디테일을 보는 눈을 키울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은 지금도 종종 한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좀 더 넓은 시야로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디자이너는 편집적으로 디테일에 집중해야 하는 직업이기에 나와 성격적으로 맞지 않는다.

기획(준비): 나는 글로 의도를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디자이너의 꿈을 잃고 방황하면서 부끄럽게도 게임을 도피처로 삼아 매일 폐인처럼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스팀에 있는 게임만 해도 100개가 넘어갔고, 방학 내내 밤새도록 게임을 하며 몇 개월간 단 한 번도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은 적도 있다. 

이전에는 롤이나 오버워치 같은 메이저한 게임만 알고 플레이했었는데 스팀을 통해 다양한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인디게임의 스토리, 아트, 독특한 게임 플레이 방식에 매료되었다. 점차 나는 나만의 개성을 담은 인디게임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게임은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몰랐기에 무작정 소프트웨어학과에 있는 게임 수업을 들었다. 해당 수업에서는 기말 과제로 팀별로 게임을 하나 만들어서 제출해야했다. 그곳에서 개발자 친구들을 사귀었고, 나의 디자이너 친구들을 동원하여 게임 개발팀을 만들었다. 그리고 팀을 주도해서 만든 내가 팀장이 되었다. 

다 좋았지만 기획을 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기획을 맡게 되었다. 게임 기획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서 인터넷에서 무작정 게임 기획서를 검색해 보면서 내가 만들고 싶은 게임을 구상해 기획서를 만들었다. 

어떤 게임을 만들고 싶은지, 어떤 시스템을 만들고 싶은지 생각하고, 이를 기획서로 만들면서 깨달은 것은 생각을 글로 적는 게 몹시 즐겁다는 것이었다. 이미지로 의도를 표현하는 건 너무 괴로웠는데 이미지를 사용하는 과정 없이 바로 글로 의도를 표현하니 너무 재밌었다. 이때 나는 내가 생각과 의도를 글로 표현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기획자라는 꿈을 갖게 되었다.

팀플은 순탄하지 않았다. 이탈하는 팀원들이 정말 많아서 게임 개발 속도가 정말 너무 느렸다. 결국 완성하는 데에는 1년의 세월이 걸렸다. 이 경험을 통해 개인 프로젝트의 경우 언제든 변수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내가 모든 분야를 기본적으로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도.

완성한 게임은 스마일게이트 인디게임 공모전에 출시했는데 운이 좋게도 상을 탈 수 있었다. 공포 게임 조선시대 방 탈출 게임이라는 개념 자체가 신선해서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해당 경험을 통해 운이 좋게도 한 스타트업 게임 기획자로 취업할 수 있었다. 

기획(현업): 나는 체계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모바일 캐주얼 게임 회사를 다니다 보니 게임의 수명이 몹시 짧고 스프린트 주기 역시 매우 빨라서 1년 남짓한 기간에 무려 5개의 게임을 맡아 리딩하는 역할을 맡았다. (놀랍게도 사실이다.) 이렇게 빠르게 많은 경험을 하다 보니 어떻게 서비스가 탄생하고 유지되는지, 서비스의 전반적인 사이클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었다. 

게임 서비스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1. 게임 제안
2. mvp 제작
3. mvp 지표 확인
4. 지표가 목표 이상이면 킥오프
5. 킥오프 팀을 꾸려 스프린트 시작

그리고 스프린트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1. 스프린트 시작 : 스프린트 기능 선정, 우선순위 정하기, 일정 산정
2. 스프린트 중간 점검 : 팀원의 작업상황 파악, 피드백 진행 (필요하다면 일정 조정)
3. 스프린트 종료 & 릴리즈 
4. 스프린트 분석 : 해당 스프린트 지표 파악 & 다음 스프린트 준비

회사에서는 늘 핵심 비즈니스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 도달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한 다음에 우선순위를 정한다. 위와 같이 1년간 체계적인 사이클을 겪고 일을 하다 보니 KPI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이제 일을 할 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생각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단계들을 생각한 다음. 그것에 집중해서 일을 진행하게 되었다.

현재 문제상황에 부딪쳤을 때 나의 행동 패턴은 아래와 같다. 
1. 핵심을 찾는다.
2. 그게 왜 핵심인지 근거를 찾는다.
3. 핵심을 달성하기 위한 절차를 세운다.
4. 절차를 충실히 따르고, 완성한다.

1년 남짓한 기간에 바로 체계화가 체화된 것에서, 나는 체계화에 강점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개발(준비): 나는 효율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1년 동안 기획자로서 열심히 회사에 다녔는데, 점점 일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는 왜 회의감이 드는지 몰랐다. 그저 열심히 일한 탓에 번 아웃이 온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기획자라는 직업이 나의 특성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아직 나의 특성을 완벽하게 파악한 건 아니지만, 내가 체계화를 좋아한다는 것은 반대로 무질서를 싫어한다는 뜻이다. 무질서는 필연적으로 비효율을 낳고, 비효율은 자원 낭비를 일으킨다. 소중한 자원이 낭비되는 것을 보면 불편한 감정이 들고 심하면 화가 나기까지 한다. 왜 자원 낭비가 불편한 감정까지 이어지는지는 모르겠다. (언젠가는 이것 또한 알게 되겠지) 하여튼 내가 파악한건 이 정도이다. 

기획자로서 일하면서 내가 느낀 건, 반복되는 업무를 자동화하는데 한계가 많다는 것이었다. 문서 템플릿을 만든다던가, 레퍼런스들을 모아둔다던가, 매뉴얼을 만드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어느 순간 더 이상 업무 효율성을 올릴 수 없다는 것을 느꼈을 때 무기력함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퇴사를 선택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1년간 쉬면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또 시작된 방황의 시간이었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고민을 많이 했다. 인간관계를 모조리 끊고 은둔하면서 책을 많이 읽었다.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 그리고 명상록이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사실 원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 부가적이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성공, 돈, 명예 그런 걸 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체계화하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이것 외에 다른 건 내 인생에서 필요 없었다. 체계화를 통해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리고 이걸 글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행복하다. 그래서 끊임없이 학습하고 발전하는 개발자를 하고 싶었다. 사실 자신이 없었다. 공부해야 할 것도 많고, 이게 내 적성에 맞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일단 해보고 깨져보면서 배우는 사람이라서 일단 시작했다. 일단 경험해 보면 뭐든 결론이 날 거라고 생각했다.

무작정 HTML, CSS, JavaScript를 공부했다. 웹을 공부하게 된 계기는 별것 없다. 내가 들은 강의에서 그것들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1개월 동안 HTML, CSS를 공부하고 2개월간 자바스크립트 딥다이브 책을 사서 꼼꼼히 읽었다. 너무 어려웠는데 나름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공부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네이버 부스트캠프 광고를 보게 되었다. 지원할 때는 가벼운 마음으로 지원했다. 프로그래머스 0레벨 문제들을 쭉 풀었고, 운이 좋게도 베이직 과정에 입과 할 수 있었다. 사실 챌린지와 맴버쉽 과정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베이직 과정만 해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운이 좋게도 멤버쉽과정 까지 갔고, 프로젝트 경험도 할 수 있었다. 부스트캠프 이전에 나는 뭘 모르는지도 모르고, 개발자가 무엇을 하는지도 잘 몰랐다면, 이제 개발자가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적어도 내가 뭘 모르는지 알겠다.


지금까지 각 분야를 겪으면서 얻은 스스로에 대한 이해를 적어보았다. 
나라는 사람을 단어로 표현하자면 체계, 효율, 넓은 시야다. 딱딱하고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7년 동안 나는 경험을 통해 스스로에 대한 이해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아직 나도 모르는 나의 모습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앞으로 깨지고 배워가면서 얻는 새로운 모습도 있을 것이고.

이제 본격적인 개발자의 길을 나아가게 될 텐데, 그 과정에서 내가 찾을 스스로의 모습이 기대된다. 나는 앞으로 또 무엇을 추구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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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이미지

김다영

카비게임즈 대표이자 1인 인디게임 개발자입니다.